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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_<간증소설> 저 높은 곳-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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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10-02 20:54 조회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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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소설> 저 높은 곳-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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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어차피 헌신한 몸이니 몸도 허약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나 하나 죽어서 이 교회가 바로 선다면 목사가 된 사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앞으로 나아가자.

 고 목사가 이런 결심을 하고 나니 어디에선가 용기가 생기고 자유가 다가왔다. 묶여있던 자신이 풀린 느낌을 맛보았다. 

 그래서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말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모든 영광 할렐루야.……"라고 찬양이 고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기 영광에 연연해 할 때는 자유가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고 앞으로 나아가면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고 목사의 마음의 눈이 사람들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 계신 곳에 분에게로 고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는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는 -다시 부르지 말라, 그리고 서로 정죄하지 말라, 우리는 다 죄인들이다. 다 오십 보 백 보가 아닙니까? 자신이 봐도 그런데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보시면 뭐가 다르겠습니까? 라고 단호히 말했다. 만약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등을 돌린다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가니 오히려 목회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 높은 곳에 계신 분께서 주신 권위였다. 그리고 현세적인 보상까지 따라왔다. 그것은 세상적인 원리와는 다른 그런 것이었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하고 스스로의 긴장을 풀고 앞으로 나아가자 교회의 긴장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양 진영의 대치 사태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담임 목사 청빙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일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몇 개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를 고 목사는 들었다. 자신을 담임으로 청빙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서 그런 교회 제직들을 불러놓고 그 안건의 불가함을 설명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이런 사태의 초래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 이런 내용이 공론화되면 교회는 극심한 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될 것이고, 자신은 이제 영적 기력이 다 쇠잔하여 설교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 목사의 진심이었다. 교회의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혹시나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지쳤고 이제는 영육이 좀 쉬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자는 분위기가 새롭게 일어났다. 물론 -고 목사가 교묘히 교회를 차지하려고 한다- 는 비난의 소리도 들렸다. 선배 목사들 중에서 -담임 목사를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라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 마다 그의 속을 끄집어 내 보일 수도 없었고 기가 막혔다. 교인들은 그렇다 치고 어찌 선배 목사들마저 그렇게 함부로 쉽게 말할 수 있는가? 고 목사는 목사들의 인격이 그렇게 가볍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에 참으로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 보일 수도 없었고, 그는 단지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던 모세에 대해 그 백성들은 걸핏하면 이러려고 끌고 왔냐 하면서 불평하고 덤벼들고 폭력 행사, 아니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럴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므로 그 위기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처럼. 고 목사는 -하나님, 저를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교인들이 되지 않을 일을 벌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두 번 죽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그렇지만 당회장 목사님이 교인들이 저러니 공동의회나 한 번 해 보자라고 제언하였다. 그러나 고 목사는 3분의 2가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짐작해서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 당회장 목사님은  청빙이 안 되면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고 목사는 듣고 보니 그럴 수 있다고 솔깃해져(?) 공동의회를 여는 것에 동의를 하게 되었다.      

 공동 의회의 결과는 고 목사나 고 목사를 반대하는 교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2/3를 넘어 가결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이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 목사의 청빙을 끈질기게 요청했던 집사 두 세 사람이 지하실에서 담담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고 목사를 찾아 내려왔다. 


 그들은 만세를 부르듯 “할렐루야!”라고 손을 쳐들었고, 공동의회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고 목사는 기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숨을 쉬면서 

-주님, 왜 이 십자가를 저에게 지우십니까?

라고 혼잣말을 했다. 혼자가 되었을 때는 기막혀서 울었다. 

-이런 교회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부목사로서 임시로 교회를 담당하고 있을 때 보다 마음에 눌림은 더 가중되었다. 그 후로 고 목사가 겪은 어려움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서 두려움이 일었다. 교인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그들이 사납게 싸우든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교인들을 마주 대하는 것조차 몹시 싫었다. 그리고는 너무나 고독하고 쓸쓸했다. 그렇다고 여전히 편이 갈라진 상태라 누굴 만나 의논하거나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설교는 부 목사로 3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미 가용 자원(?)이 바닥이 났고, 신장이 나빴던 그는 건강 역시 바닥이었다. 30대 후반 치곤 영육이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교인들을 원하는 대로 설득할 능력이나 재간도 없었고, 목회 경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그는 그저 하나님 앞에 앉아 우는 일밖에 없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라는 요한복음 8장 29절을 반복 암송하며 그냥 울다가 일어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QT를 하다가 창세기 28장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생각지 않은 은혜를 받았다. 그 날 아침에 고 목사에게 참으로 벅찬 감격과 감사가 찾아왔다. 큰 위로와 격려를 받고 희망을 얻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분노한 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낯선 외갓집으로 가다가 혼자서 쓸쓸한 첫 날 밤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야곱의 마음은 혹시 형이 뒤쫓아 오지 않아 불안한 마음과 아무도 없는 고독한 처지에서 밤을 보내야 했든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 야곱의 눈에서는 금방 눈물이라고 쏟아질 듯 하였을 것이다. 마마보이로서 늘 엄마 주변에서 맴 돌며 그 사랑의 치마폭에 싸여서 살든 야곱이 맹수와 독사가 나타날 수 있는 환경에서 홀로 밤을 새운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지내야 했던 처량한 처지의 야곱. 아마 엄마를 부르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그렇게 두려움 떨며 지쳐 잠이 든 야곱이 꿈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신 것이다. 땅에서부터 저 높은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음성이 들렸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3-15)


 야곱은 몹시 놀라면서도 너무 좋았고, 또한 감격했을 것이다. 그는 잠을 깨어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서원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 

 고 목사는 자신의 고립무원의 처지가 야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목사가 되고 난 날부터 그가 당해온 것은 존중이나 존경이 아니라 무시, 거절, 폭력적인 대우, 가난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항상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좌절감 등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야곱에게 함께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동행과 격려와 위로의 언약이 마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과 같이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야곱처럼 좋았고, 감격했던 것이다. 어느 누구의 격려와 위로보다 힘이 솟아나게 했다. 


 그러면서 -그렇다. 내가 비록 이 쓸쓸하고 척박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나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저 놓은 곳,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 저 영광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저 높은 곳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마음 깊은 곳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새벽의 QT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고 목사는 자신을 반대하는 교인들을 설득하는 일에 나섰다. “나도 원치 않았으나 이렇게 담임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계속 흔들리고 반대하면 교회 수습의 길은 없다. 언제까지 다투고 싸울 것인가? 나를 반대하는 여러분들의 마음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마음을 모아 달라. 여러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 목회를 하겠으니, 도와 달라.” 그들을 잠잠했다. 고 목사의 말에 반대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들도 교회가 안정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느 날, 고 목사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험한 욕을 했던 집사 한 사람이 과일 한 상자를 사들고 그를 찾아왔다. 그 동안 죄송했다고 하며 교회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잘못한 것들을 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고 목사는 그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떠남을 만류했다. "집사님, 감사합니다. 먼저 찾아주시니 저보다 신앙의 선배이십니다. 진짜 잘못한 사람들은 우리 목사, 장로들이지요. 이제는 과거는 잊고 회개하고 화해했으면 함께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 그 열매 아니겠습니까?“ 라고 떠남을 만류했다.   


고 목사는 교회가 혼란 속에서 이것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하는 깊은 절망에 빠졌고 난리를 치는 교인들을 보면서는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구제 불능의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도 깊이 젖어들어 갔다. 그러나 그런 화해의 분위기가 서서히 전개되자, 그런 인간관에도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사람을 보는 시각도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자, 곧 창조와 구석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자.

 도무지 그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고 미워지면 하나님의 구속을 다시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그 집사는 고 목사의 간곡한 권면에 당장은 대답하지 않고 좀 더 기도해 보겠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그 집사가 돌아간 후에 고 목사는 어떤 매임에서 풀리는 자유와 기쁨을 맛보았다. 회개와 화해는 마음이 풀리는 역사를 일으키는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연말에 그 집사는 자신은 아무래도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최종 결정을 알려왔다. 그 땐 고 목사는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고 목사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서로가 자유함 가운데서 헤어졌다. 그 집사가 떠나가자 교회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고 서로 간에 대치하고 있든 전선은 사라지고 말았다. 긴장감은 봄눈 녹듯 사라졌고, 교회에는 평화가 깃들었고 그러자 새로운 가족들이 교회를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고 목사는 목회자로서의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 같았던 몇 년 간처럼 그렇지는 않았다. 고 목사가 가장 기쁨을 맛보는 것은 그를 반대하는 교인들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서서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으로 전개가 되니까 마음을 열고 들으면 설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경우, 교회는 여자 성도들이 많은데 고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는 중년 남자 교인들이 많았다. 그것은 중년 남성들은 감정적이라기보다 논리적인 말씀에 끌리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고 목사는 몇 년 간의 겪었던 수치와 모멸 그리고 가난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하여도 그런 과거의 일을 잊고 교만한 마음이 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그는 남자 성도들 틈에 알 듯 모를 듯한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어둠이 잔뜩 깔려 있었고 마음에 평화는 전혀 없는 느낌을 주었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기를 쏘아 보는 듯 한 시선을 던졌다가는 또 눈을 감고 있다가 또 쏘아 보는 듯 한 시선을 던졌다. 고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도  

-누굴까? 

하는 마음으로 좀 혼란스러웠다. 예배를 마치고 잠시 대화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그 사람이 자신 앞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렸는데, 아마 일찍 교회를 나간 것 같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날 밤 사택으로 돌아와서는 누굴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그러다 문득, 그 친구다! 라고 생각이 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친구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약사였던, 그리고 자기를 향해 너 예수쟁이야? 라고 조롱 섞인 물음을 했던 그 반장이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찾아오는 길 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이었다. 교회를 왔던 고등학교 시절의 그 반장이 횡령과 배임으로 구속되는 장면을 TV 뉴스에서 고 목사는 보았다. 그 반장 친구가 재벌그룹의 사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다. 그러나 그 후로의 행적은 잘 모르고 지냈다. 고 목사는 그 친구는 지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살았고, 자신은 저 높은 곳을 소망하고 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조금 남았지만, 자신의 가는 길이 옳고 그 길을 잘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    *   *    

  

 세월이 흘러 고 목사의 나이 이제 65세. 서울이 아닌, 경기 남부의 한 시(市)에 소재한 교회에서 그는 은퇴식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13년. 교인수가 1,500명이 넘으면 분립개척을 한다고 공언하였고 그렇게 되자 자신이 200명 정도의 교인과 분립하여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교인들이 그 때 보다 열 배가 되었다. 아직 정년이 5년이나 남아있었는데, 조기 은퇴를 결행한 것이었다. 그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70세가 되어도 되도록이면 은퇴를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려고 하는 다른 목회자들과는 너무 다른 결정이었다.  

 

 고 목사는 은퇴식이 진행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는 찬양의 전주가 나오는 순간부터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찬양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계속 울었다. 물론 그것은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에 대한 한없는 감사의 울음이었다. 30여 년 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한밤중처럼 어둡고, 그래서 두렵고 또한 쓸쓸했던 날들. 그가 믿었고 도우심을 바랐던 저 높은 곳의 그 분은 그런 처지의 그를 우뚝 세워 주셨다. 누군가는 그를 영적 거인이라고 평했다. 그 보다 체구가 월등하게 큰 사람들도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존경을 나타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자신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살아온 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몇 계단만 더 올라가면 영광스런 아버지 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라고 고 목사가 울면서 마음으로 했던 말이었다.      

         

 지상의 저 높은 곳, 일테면 히말라야 같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 자신 스스로 만족을 맛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수도 있지만 때때로 가는 도중에 생명까지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면 이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그런 정상을 향하여 가든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추락사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면서 그곳을 사모하고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그 가는 길이 어떠하든 결국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의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그 길을 가기 때문이고 하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은 그 곳에 계신 분이 그들을 도와주시고 또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그런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글/곽철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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